✎. Memory story

먼저가신 엄마 보다 큰 언니가 더 그리운것은...

다희풀잎 2011. 2. 13. 01:02

 

 

 

 

내 나이 6살때

수녀원에서 나오고 난 후 강제로 선을 보고 일주일후에 약혼

한달뒤에 큰 언니는 결혼했다.

손이 귀한 집 3대독자 형부..

대학을 입학 ..형부역시 홀로 자신만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언니와 선을 보았다.

빼어난 미모의 언니에게 단번에 반해 처음 시작은  강제였지만,

언니를 보고 난 이후부터는  형부가 더 서둘렀다..

그리고 언니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잉꼬 부부로 살았다.

 

언니의 시어머님은 북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자수성가 하신 분이셨다..

번 돈을 모두 부동산에 투자를 해서 실패없이 성공만 하셨다..

돈을 벌면 번만큼 일년에 하나씩 부동산을 샀다.

부동산을 사기만 했지 절대로 파는일은 없었다.

 

언니는 첫아이를 낳았지만  일주일만에 잃었고

산후 조리도 못하고,눈물을 지내고 있을 때 

친정엄마인 ,,내 엄마가 세상을 떠나

슬픔때문에 초죽음 상태였지만,

남겨진 동생들을 생각해서  꿋꿋하게 털고 일어섰다..

 

그이후 엄마가 필요한 자리에  언니가 꼭 있었다.

 

 

 

 

 

언니의 시어머니는 시장안에서  규모가 큰 가게

이불, 비단과,다른 여러천들,한복점을 평생동안 해오셨다..

언니는 그집으로 시집을 간 이후부터

해마다 내게  추석,설에 고운 한복을 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해줄거라곤 한복 뿐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과 색으로 한복을 맞춰주었다.

일찍 엄마를 떠나보낸 내겐

엄마에 대한 기억과 애절함보다 큰언니에 대한 애틋함이 곱절이다...

 

 

 

 

 

 

 

 

우리부부는 결혼할때 한복을 입고 결혼했다.

결혼식에 입을 한복만큼은 제일 비싼걸로 해주고 싶다는 언니의

바램으로 대구중앙통에서 21년전에  한1벌에 150만원인가 주고

한복을 맞추어 준 언니..

그리고 두루마기2벌에 3벌의 한복을 더 맞춰주었다..

이것은 언니네 집에서...

 

 

언니에게 나는 어쩌면 자신의 자식보다 더 신경이 써였던

저린 손가락이 아니였을까 싶다..

혹시 엄마 없어 기가 죽을까봐  나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쏟았다.

대학시절

자주 보내오던 긴 장문의 편지..무슨 할말이 그리 많았는지..

한꺼번에 4-5장씩 적어 보낸 편지들...

 

동생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지도 못하고,

내 아이가 태어난지 백일도 되기전 언니도 엄마처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후 아이가 태어나기전까지 입던 한복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구석으로 들어갔고,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다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큰 딸에게 입혀보니 나보다 훨씬 큰 덩치때문에,

작았다..

"이모가 살아있다면 해마다 이뿌다며 너희들 한복은 곱게 입혀 주었을텐데..

그리고 내 아이들을 얼마나  예쁘다 했을까?"

절로 눈물이 떨어진다..

 

어느때는 부모님께 미안한 생각이 든다..

낳고 키워준 부모는 자주 떠올리지 않고,

언니생각을 더 많이 하고 ,꽃도 못 피우고 일찍 떠난 친구를

더 자주 생각하고 그리워하게 될 때...

 

고2 수학여행을  떠나기 위해 열차역으로 나갔더니,

막내 좋아한다고 계란 한판 삶아서 검은 비닐 봉지에 싸서

그 새벽 집을 나서서 내 얼굴을 보기위해

역에 서 있던 언니의 미소를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벌써 30년전일임에도,,,,

내가 이렇게나마 행복하게 살수 있는것도

언니의 사랑때문이 아니였을까?

언니에게 사랑을 덤뿍 받고 자라서 나또한 사랑을 베풀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니...

 

나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열심히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갔을 때 그리운 큰언니를

꼭 다시 만나고 싶기에....부모님도,,,